평온한 아침입니다.
산책중에 옆에 도서관을 짓고 있네요
지나다가 문득 허공을 쳐다보다 마음과 허공은 참으로 닮았네를 떠올렸습니다.
허공은 빌딩을 지으면 빌딩이 들어설 자리를 내어주고, 빌딩이 없어지면 다시 그 자리가 드러납니다.
수많은 빌딩숲을 오가며 아파트가 들어서고 사라져도 허공은 늘 그 자리에서 맞아주고 작별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합니다.
허공은 화도 내지 않고,
욕심도 부리지 않고,
어리석음에 끄달리지도 않습니다.
그저 오고 감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아니,
허공이 마음이고 마음이 허공이로구나!
허공이라는 바탕을 바라보다
허공이 없다면 어디에 빌딩이 들어서고, 어디에서 허물어지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마음을 떠나 분별과 망상, 탐진치가 따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마음의 바탕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허공에 빌딩이 들어서고 사라지듯, 마음에서도 수많은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떠올린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고 마음이 새로 생긴 것도 아니고, 생각이 사라졌다고 마음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도 짓고 악도 짓는구나
우리는 마음에 참으로 많은 빌딩을 짓습니다.
이것은 선이다.
저것은 악이다.
이것은 좋다.
저것은 싫다.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끄달려 기뻐하고 화를 냅니다.
선을 안다고 선에 집착할 필요는 없고, 악을 안다고 미움에 붙들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되 그 분별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필요한 일은 바르게 행하면서도 마음은 자유로울 수 있겠지요.
그런데 허공은 어떻습니까?
선이라는 빌딩이 들어선다고 더 좋아하지 않고, 악이라는 빌딩이 들어선다고 성내지도 않습니다.
그저 잠시 자리가 드러날 뿐입니다.
아!
허공성이 자성이고 불성이구나!
그 말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도 허공이라는 실체를 따로 세우거나, 불성이라는 무엇을 붙잡으려는 것은 아닌지 다시 살펴봅니다.
탐진치를 보니 계정혜가 있구나
사대(四大)가 인연 따라 모인 이 몸.
이 몸으로 보고 듣고 느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좋아하는 것을 만나면 더 가지고 싶고, 싫어하는 것을 만나면 밀어내고 싶습니다.
그렇게 탐진치가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런데 탐진치가 일어나는 모습을 바로 살필 수 있다면 어떨까요?
탐욕에 끄달려 행동하지 않고,
성냄에 사로잡혀 남을 해치지 않으며,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습을 바르게 보는 것.
그 일상 속에 계정혜(戒定慧)의 실천이 있겠지요.
계정혜는 어디 먼 곳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인연 속에서 닦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허공은 빌딩을 맞이하면서도 맞이한다는 생각이 없고, 건물을 떠나보내면서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반가우면 반갑다고 인사하고,
슬프면 눈물이 흐르며,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손을 내밀기도 합니다.
인연에 따른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외면하는 일이 아니겠지요.
다만 그 인연에 붙잡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허공을 떠올렸을 뿐인데 마음이 보이고, 마음을 살피니 탐진치와 계정혜가 떠올랐습니다.
허공과 마음이 닮았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둘을 나누던 생각마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빌딩이 들어서고 사라집니다.
허공은 빌딩을 붙잡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수많은 인연이 오고 갑니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오늘 아침의 말꺼리는 여기까지입니다.
※ 자료 확인
이 글은 2026년 11월 3일 아침, 허공과 빌딩숲을 떠올리며 나눈 개인적인 사유와 알아차림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탐진치(貪瞋癡)는 탐욕·성냄·어리석음을, 계정혜(戒定慧)는 계율·선정·지혜의 세 가지 배움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입니다.
허공과 마음의 관계에 관한 표현은 특정 경전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오늘 아침의 개인적인 사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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